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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의 풀과 꽃들 – 이혜성의 작품세계 / 유진상

 

이혜성은 유화로 풀과 꽃을 그리는 작가이다. 작가는 일상 속에서 수없이 많이 재배되고 또 그만큼 빠르게 버려지는 식물들에 주목했다고 한다. 특히 꽃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한없이 아름다운 자태를 우리에게 보여주고는 곧 져버린다. 꽃이 아름다운 순간은 이미 줄기에서 잘려져 소멸을 향해 나아가는 순간이다. 이혜성이 그리는 식물들은 대체로 세상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한, 버려지기 직전의 것들이다. 작가는 이 식물들 하나하나를 정교한 세필화의 기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마치 한 송이 한 송이의 꽃이나 풀들에 대해 개별적인 초상화를 그리듯이, 정밀한 붓질과 선으로 화면 전체에 걸쳐 촘촘하게 그린다.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짐작하게 하는 그 세세함으로 인해 관객은 전체와 부분 중 어느 것에 먼저 시선의 초점을 두어야 할지 알 수 없게 된다.

2016년에 작가는 단테의 <신곡 La Divina Commedia>을 바탕으로 삼부작을 그렸다. 각각 <재생 Regeneration>, <정화 Purification>, <소멸 Annihilation>의 주제로 그려진 이 작품들은 이혜성의 ‘꽃’ 혹은 ‘식물’이 거대한 서사의 은유적 대응으로서 차용된 소재임을 알려준다. 이 작품은 이어서 전시할 경우,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지옥, 연옥, 천국에 대응하는 이행을 보여준다. 이미 타버린 듯한 메마른 갈색의 ‘소멸’, 이제 막 붉게 타들어가는 ‘정화’, 그리고 푸르름을 발산하는 ‘재생’의 세 화면에서 풀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육체와 영혼들을 재현하고 있다. 비유(allegory)로서의 회화적 구성은 필연적으로 도상학적 해석을 불러들인다. 회화는 두 가지 측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그림 자체가 지니는 시각적이고 물리적인 현존(presence)이다. 둘째는, 소위 도상학적 구성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림이 함축하는 사유의 차원이다. 이혜성의 회화는 수많은 붓질과 필선들의 교직(交織)으로 구축된 회화적 층위들로 인해 강렬한 물성과 존재감을 뿜어낸다. 그의 붓질과 필선은 가까이에서 보면 식물의 재현보다는 그 자체로서 화면에 발리거나 그어진 자발적 흔적들(spontaneous marks)에 가깝다. 즉 묘사(description)가 아닌 ‘쓰기’(writing)이나 ‘낙서’(graffiti)에 가까운 것이다. 작가는 붓이나 펜의 운용에 있어 재현/비-재현의 경계 지점을 오간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그가 ‘신곡’과 같은 텍스트를 기반으로 작업하는 이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전적으로 회화이면서, 그 움직임에 있어 텍스트에 근접하는 태도를 취하는 것, 이것이 이혜성의 작업을 이해하는 하나의 단서가 될 것이다.

 

동서양을 가릴 것 없이 식물이나 꽃은 영혼과 정신을 함축하는 은유적 기호로 사용되어 왔다. 서구의 중세에서 각각의 식물들이 어떤 의미로 그림에 인용되었는지를 아는 것은 회화론의 기초를 이룬다. 이혜성의 작품에서 각각의 식물을 유형학적으로 분류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그림에 등장하는 식물들은 종류의 구분 없이 커다란 의미가 없거나 버려지는 것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2018년부터 그려지는 꽃들을 주제로 한 연작의 제목은 <이름 없는 꽃들 Nameless Flowers>이 되었다. 작가는 일상에서 매일 수없이 버려지는 꽃들을 작업실에 모아 놓고 그렸다고 한다. 그는 천천히 마르거나 썩어가는 꽃들을 그리면서 무의미를 향해 나아가는 존재들의 군상(群像)을 기록하였다. 여기에서 도상학적 핵심은 바로 꽃들의 ‘이름 없음’과 그것들의 더미, 병치, 혼재, 느린 공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유사한 장르를 17세기의 전형적 정물화인 ‘바니타스(Vanitas)’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니타스와 이혜성의 회화 사이에 가로 놓인 차이점은 전자가 덧없음, 허무함, 죽음의 환기를 향해 배치되어 있는 반면, 이혜성의 회화는 앞서 ‘신곡’에서 보았듯이 ‘열린 서사’, ‘회화적 세계관’, 그것들을 서술하는 ‘글쓰기’를 향해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2018년의 <이름 없는 꽃들> 연작이 거대한 삼부작의 형태로 몰입을 이끌어내는 거대한 공간을 다루었다면, 2019년부터 2021년까지 그려진 동명의 연작들은 각기 다른 조건의 글쓰기를 위해 다양한 빛과 색채들로 그려졌다. 무엇보다도 이 시기의 작품들에서는 갈색과 검은색의 주조(主調)를 통해 죽음과 소멸이라는 서사적 테마에 다가서고 있는데, 코로나로 인한 판데믹이 전 세계를 뒤덮기 시작한 암울한 시기에 그려진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2021년에 주로 소품들로 그린 <검은 식물들 Black Plants> 연작은 검은색 배경 위에 세필로 종류를 알 수 없는 이종(異種)의 식물들을 묘사함으로써 흡사 중세 유럽의 세밀화를 연상시키는 음울하고도 기괴한 화면을 만들어내었다. ‘죽음’은 이혜성의 작품 속에서 지속적이고 반복적으로 다루어지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실락원 Paradise Lost>는 이러한 기형의 꽃들이 펼쳐져 있는 들판을 그린 것으로, 짙은 어둠 속에서 흐릿한 달빛을 받고 있는 것처럼 번들거리는 식물들의 모습은 흡사 구원받지 못하고 명부(冥府)를 떠도는 영혼들처럼 보인다. 2021년의 <Scent> 연작은 옅은 녹색에서 짙은 갈색에 이르는 다양한 화면들을 통해 부패되거나 변해버린 듯한 사물의 표면을 다루고 있다. 제목에서 ‘냄새’ 혹은 ‘향’이라고 지시한 대상은 아마도 그 과정에서 파생되었을 후각적 경험을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판데믹 시기에 이렇듯 어두운 톤의 그림들만 그려진 것은 아니다. 같은 시기의 또 다른 연작인 <영원한 삶 Eternal life>은 이미 말라서 가루가 되어가는 식물의 잔해를 그린 것이다. 흡사 바람이 불면 흩어져 날아갈 것 같은 이 마른 사체들은 그것들이 놓인 밝은 배경의 공간과 빛으로 인해 흡사 아름다운 제의(祭儀)의 장소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때 이 흔적에 깃들어 있던 생명이 배경의 밝은 빛으로 치환되고 있는 것인 양 잔해들이 흰색의 여백을 향해 희박해지면서 녹아드는 형태들이 나타난다. 밝은 빛을 향해 형태들이 흐릿해지면서 녹아드는 구성은 이후 <엘리시온>에서 다시 나타난다.

 

이혜성은 2021년에 <이름 없는 꽃들>이라는 주제로 꽃들로 가득 찬 폭 10m에 이르는 거대한 대작을 그렸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텍스트를 읽어나간다. 그런 식으로 이 그림을 보면 <신곡> 연작에서처럼 좌측의 거대한 어둠으로부터 우측의 밝은 빛에 이르기까지 꽃들의 소멸, 변화, 생성의 흐름을 차례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읽어낼 수 있다. 즉 삶에서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과정을 그린 것인 셈이다. 또 다른 대작 <엘리시온 Elysion>에서도 작가는 밝은 빛과 어둠의 거대한 대비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여기에 그려진 너른 꽃밭은 오후에서 저녁으로 넘어가는 아직 햇빛과 온기가 남아있는 시간대의 빛으로 가득 차있다. 그와 같은 사실은 화면의 위쪽을 뒤덮고 있는 낮의 밝은 빛으로 알 수 있으며, 이 화창한 영역으로부터 천천히 아래쪽으로 시선이 이동하면 점점 어두운 오후의 끝 무렵이 드리워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꽃들은 먼 위쪽의 밝음을 향해 펼쳐져 있지만, 관객에게 가장 가까운 아래쪽의 꽃들은 마치 그림자 속의 현실 속에 놓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꽃들은 아직 낙원이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차안(此岸)에 남아있는 꽃들이다. 작가의 작품 속에서 은유적 서사를 읽어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수많은 꽃들은 현실 속에서 무리지어 있는 사람들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것들이 놓여 있는 장소는 저 멀리 빛의 들판으로 향해 이어지는, 희망으로 나아가는 장소처럼 보인다. 아직 낙원으로 다가가지 못한 수많은 인간들처럼 그늘 속의 꽃들은 현재의 구체성에 사로잡혀 있다.

 

<신곡>과 <실락원>을 통해 볼 수 있듯이 이혜성의 회화를 가로지르는 세계관은 기독교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구조적인 서사를 작품에 투사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회화는 죽음과 부활이 공존하는 은유적 세계로서의 들판과 거기에서 돋아나는 존재들에 대한 글쓰기이다. <엘리시온>은 바로 이 풍경의 중의적 의미를 가리킨다. ‘엘리시온’이 의미하는 것은 ‘낙원’이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이곳은 항상 봄날만 이어지는, 꽃들로 가득한 땅으로, 신의 선택을 받은 이들이 죽음을 초월하여 초대되는 땅이다. 특이한 것은 이 ‘축복의 땅’을 죽음의 신인 하데스가 다스린다는 사실이다. 이곳은 시인들과 영웅들, 이타적인 영혼들과 신실한 자들이 초대받는 곳이다. (이들과 달리 죄 많은 영혼들은 지옥으로 보내어진다. 즉 망자들에게는 두 개의 목적지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작가가 죽음과 영생, 망각과 열락이 공존하는 이 장소를 주제로 하여 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밀턴(John Milton)의 <실낙원>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 ‘엘리시온’이라는 주제가 암시하듯, 이혜성의 작품에는 아름다움과 안타까움, 현재에 대한 집착과 상실, 정교함이 주는 실감과 형이상학적인 추상성이 공존한다. <실낙원>의 잃어버린 이상향과 ‘엘리시온’이라는 피안(彼岸)의 낙원이 연상시키는 것은 과거와 미래를 대칭으로 하여 그림 앞에 서있는 관객의 현재, 바로 그 순간에 대한 감각을 가리키고 있다. 인간의 삶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어 있다. 누구도 현재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회화는 그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그림자 속의 꽃들을 그리면서 현재에 사로잡힌 그것들의 화려함과 덧없음의 공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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