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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성 작가론

꽃과 함께

 

김노암(LG시그니처 아트갤러리 예술감독)

꽃은 비싼 쓰레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 입학식과 졸업식 등 인생의 한 시기를 시작하거나 마칠 때 우리는 꽃을 선물한다. 순간의 의미로 사용된 뒤에 꽃은 너무도 빨리 폐기 처분된다.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되어버린다. 꽃이 대체 불가능한 생명체에서 언제든 교환 가능한 제품처럼 변한다. 그러나 죽음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꽃은 화려하게 의미 있는 존재로 부활한다. 여전히 꽃을 누군가에게 주는 행위에는 인류사에 오래되고 깊은 문화적 가치와 의미의 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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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성 작가는 오래전부터 전시에서 축하용으로 보내온 꽃들과 평소 길거리에 버려진 꽃들을 모아왔다. 작업실은 온통 선물 받거나 주어온 꽃과 식물로 가득하다. 생생한 꽃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꽃들은 오래되어 바싹 마른 꽃들이고 심지어 정체를 알 수 없는 곰팡이가 핀 것들도 많았다. 작가는 이렇게 모은 꽃들의 이미지를 그림 속에 모으고 있었다.

지난 시기 작품들은 인상적으로는 구별하기 어려운 이미지들에 작가가 붙인 제목들을 알기 전과 알고 난 후의 인상이 달라진다. 작가는 고유의 목표나 비전을 거대한 그림으로 설정했다. 작업 ‘신곡’ 이후에 ‘실락원’, 그리고 2018년 이후 ‘이름 없는 꽃’, 일련의 제목과 키워드의 흐름은 작가가 현세보다는 이상적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높은 차원의 가치, 비전, 영적 모색이 작가의 중요한 화두인 셈이다.

 

작가의 이미지 형성 배경을 이해하려면 먼저 2016년 세 개의 패널로 제작한 작업인 ‘신곡’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신곡’은 시간의 흐름과 변화 속에 끝없이 변화하는 식물들과 그 풍경들을 담아내는 세 공간, 세 시간에 따라서 연상된 인간 마음의 변화에 따라서 외적 풍경 또한 변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감정의 변화에 따라서 외부의 풍경 또한 다른 이미지로 변화한다는 발상이다. 이 작업은 작가가 예술가로서 어떤 체험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작품에 몰입할 때 평범한 일상의 의식을 벗어나 다른 차원으로 도약한다.

 

무언가 다른 세계를 꿈꾸는 사유는 인류의 탄생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유럽의 중세의 신학적 사유의 흐름과 심미적 감각과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 또는 <걸리버 여행기>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정말 이상한 세계들이 떠오른다. 이 세계와 저 세계의 사이에 있는 중간계로서 ‘연옥’의 탄생을 떠올릴 수도 있다. 인간은 왜 다른 차원, 여기가 아닌 어떤 곳을 찾는가? 화가는 심미적 경로를 따라서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가려 한다. 결국 이러한 모험은 인류의 세계를 확장하고 더 높은 차원으로 성장하는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작가와의 대화에서 떠오른 단상들을 한발 물러나 보면 오래된 꿈들 또는 집단적 차원의 무의식을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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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거의 모든 화면은 빈틈 없이 꽃들로 또는 식물들로 가득하다. 꾸역꾸역 비집고 피었던 꽃들이 금방 시들해지고 만다. 이 이미지들은 약속된 언어화 이전의 이미지이다. 길거리의 꽃들, 마른꽃들, 곧 말라버릴 꽃들, 아무리 생생한 꽃들도 마침내 시들고 말라버린다. 말라버린 꽃은 더 이상 꽃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탁하고 검게 시들어버리는 자연계의 생명이 모두 거쳐야 할 과정을 아주 짧은 시간에 극적으로 재현한다.

 

인류는 오랫동안 꽃을 천국이나 이상향 또는 여성적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여겼다. 꽃봉오리에서 꽃이 벌어지는 것은 창조 에너지의 발현으로 보았고, 대지의 신과 태양신이 함께 풍요를 약속하는 것을 의미했다. 꽃은 젊음과 생기의 상징으로서 여겼지만 동시에 오래가지 못하는 삶의 덧없음과 허무를 상징하기도 했다. 꽃은 영적 세계와 세속의 사이에 놓인 오래된 상징이다.

 

마른 꽃으로 표현한 죽음의 이미지는 미술의 오래된 주제이기도 하다. 바니타스(Vanitas)에는 삶과 죽음의 알레고리로서 생물학적 또는 자연계의 생로병사와 실존적 의미 등이 결합된 허무의 감각이 녹아든다. 작가의 이미지는 풍경화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주제적으로는 바니타스 정물화와 연결된다. 텅 빈 세속적 욕망의 말로를 담은 거대한 정물화를 닮은 작가의 이미지는 바람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 멈춰버린 세상의 풍경이다.

 

중세 유럽의 흑사병과 잦은 전쟁으로 죽음이 생활의 중심이었던 시절 사람들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깊이 사유했다.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방에서 이를 주제로 한 정물화가 많이 그려졌다. 유렵의 종교개혁 시기와 맞물려 세속의 부귀영화를 헛된 것으로 여기는 칼빈주의자들의 세계관을 떠올린다. 한편으로는 17세기 영국의 존 버년(John Bunyan)의 작품 <천로역정天路歷程, Pilgrim Progress> 속 주인공 크리스찬이 겪는 내면의 변화를 떠올린다. 세속과 탈속, 물질의 세계와 영적 세계가 미로처럼 얽힌 길을 따라가는 과정에 교묘하게 연금술적 결합을 하는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꽃들의 무더기. 거대한 무덤처럼 마구 뭉쳐있는 꽃들. 꽃들이 거대하고 황량한 불모의 대지를 덮는다. 셀 수 없이 많은 꽃들은 그리고 생생한 활력의 뿌리가 뽑힌 채 말라 비틀리는 꽃들은 죽음의 형상을 떠올린다. 죽음, 세상의 질병을 떠안은 희생제의처럼 그늘진 꽃들의 그림자가 쌓이며 공간을 조밀하게 채우는 이미지는 꽃들을 하나도 닮지 않은 인공의 물감이라는 물질과 인위의 붓질이라는 감각적 향연이 융합하며 거대한 형이상학적 현상으로 변신한다.

 

죽은 꽃은 향기가 없다고 하지만 많은 예술가들에게는 죽음 그 자체가 독특한 향기가 있다고 토로한다. 죽은 꽃도 향기로울 때가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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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이후의 삶이란 가능한가? 만일 그러한 또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있다면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빈 껍데기만 남은 정신으로 텅 빈 시간을 영원히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삶과 죽음의 경계, 중간계를 떠올린다.

 

‘중간계’하면 <반지의 제왕>을 떠올리지만 소설가 박상륭의 소설 <죽음의 한 연구>속 가공의 무대 ‘유리(중간계)’의 세계도 일종의 중간계로 나타난다. ‘유리’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인간이기도 하고 귀신이기도 하다. 또는 인간도 귀신도 아닌 아무 존재도 아닌 허깨비일 수도 있다. 폭력과 살인과 공포와 탐욕이 난무하는 착각의 세계이다. <죽음의 한 연구>에서 주인공은 불모의 세계서 생명을 탐구하는 구도자로 묘사된다. 중간계에서는 물질적인 감각과 비물질적인 사유가 충돌하고 융합하고 분해되며 무한히 변화하며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공존하는 세계다. 뒤섞임의 세계. 선과 악, 사랑과 증오, 과거와 현재, 미래가 순서 없이 흩어지고 모인다. 중간계란 인간이 사유할 수 있는 가장 극단의 경계에 놓인 풍경이다. 세속의 욕망과 물신으로부터 벗어나는 구도의 길은 예술에 큰 영감을 준다.

 

실상과 허상이 공존하는 공간. 가장 감각적인 꽃의 세계는 가장 성스러운 세계와 만난다. 법열의 순간, 삶과 죽음은 존재의 두 얼굴이다. 이미지는 신령스런 무엇으로 변한다. 작가의 이미지는 내면의 풍경을 구성하는 자연의 생로병사의 일상과 죽음 후의 부활을 떠올리는 비일상이 공존한다.

 

뿌리 뽑힌 꽃은 아주 빨리 말라버린다. 마른 꽃들 무더기 사이로 잠깐씩 뭔가가 보일 듯하다. 뭔가 비밀을 품은 것들이 꽃들의 죽음 뒤에 가만히 숨죽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화면 가득 채워진 마른 꽃들에 비가 내린다. 감동 없는 일상의 영원한 반복. 봄과 여름은 신기루처럼 불투명해지며 흑백의 풍경이 된다. 도시 속 꽃의 일생이란 드라마틱한 인류의 현실을 닮았다. 꽃이 모두 식물이기를 그만두고 인간이 될 때가 있다. 이혜성 작가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천착하며 죽은 꽃에 숨을 불어넣는 행위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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